“평생 한 마을, 한 교회 – 믿음 지킨 삶의 자리"

  • 김광회 집사님
    1948년 12월 15일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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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을 걸어온 그 자리에서, 지금도 조용히 하나님을 섬기며

한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고, 가정을 이루고, 평생을 머물며 하나님을 알아간 사람. 김광회 집사님의 인생은 그렇게 조용하지만 깊은 뿌리로 이어져 있다. 그는 1948년 행암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 마을을 떠난 적이 거의 없다. 농촌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신앙도, 교회도, 가정도 스스로의 손으로 일궈나가야 했던 시간 속에서,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충실히 살아냈다. “고생이라기보다 보람이죠”라며 담담히 말하는 집사님의 고백 속에는 그 어떤 휘황찬란한 간증보다 무게 있는 ‘삶의 신앙’이 배어 있다. ‘인생화원’ 팀은 행암교회 신앙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이 땅의 어른들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이 자리에 섰다. 김광회 집사님은 마을의 역사이자 교회의 역사이며, 이제 그 기억을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는 신앙의 유산으로 남기려 한다.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늙어가는 삶”

김광회 집사님은 1948년, 행암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다. 지금은 허물어진 옛 기와집이 그의 출생지였고, 지금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결혼 역시 이 마을에서 만난 아내와 함께 1971년에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아직도 당시의 결혼식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결혼 이후 단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부부가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걸어온 세월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신앙 여정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집 역시 어렵게 손수 지은 집이다. 아들이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온 날, 함께 벽돌을 쌓으며 집을 완성했던 기억은 지금도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다. 그는 그 집에서 자녀 넷을 키우고 대학까지 보냈다. 삶의 자리에서 벗어난 적 없는 그는, 그래서 누구보다 이 땅을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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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세 번이나 지은 남자”

김광회 집사님의 신앙 여정은 늦게 시작되었다. 결혼 후에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던 그는 아내가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것을 존중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를 건축할 때마다 그는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직접 땅을 사고, 벽돌을 지고, 집을 짓고, 마당을 정리했다. 교회를 위해 일하던 그의 손길은 이미 신앙의 표현이었다. “저는 이 교회를 세 번째로 지은 사람이에요”라고 담담하게 말하던 그는, 그렇게 신앙보다 먼저 ‘교회를 지은 자’가 되었다. 실제로 지금의 교회가 리모델링 되기까지 그는 자신의 쌀 농사로 지은 곡식을 교회에 헌납해 왔고, 리모델링 당시에도 기꺼이 헌금하며 힘을 보탰다. 그의 삶에는 눈에 띄는 대단한 간증은 없지만, 교회를 위해 평생을 내어준 그 손이 곧 믿음의 증거다.


“늦게 피어난 믿음의 꽃”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건 2001년 즈음부터였다. 큰아들이 어릴 적 물에 빠지는 사고를 겪은 후, 그의 마음은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가 교회를 찾아 나선 결정적인 계기는 딸의 결혼식이 서울의 한 대형교회에서 치러지면서부터였다. 교회 안에서 딸을 축복해주는 분위기에 마음이 따뜻해졌고, 그날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예배에 참여하게 되었다. 늦게 피어난 믿음은 그러나 단단했다. 그는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마음에 막힘이 있었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고백했다. 외적인 신앙은 늦었지만, 마음 안에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갈망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의 삶을 이끌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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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가정을 세운 아버지”

김광회 집사님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녀들을 사랑한 아버지였다. 아이들을 혼자 두고 밭에 나가야 했던 시절, 대문 앞에 엎드려 자고 있는 자녀들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환경 속에서도 네 자녀 모두 대학까지 마치고, 지금은 각자의 가정을 이루어 잘 살고 있다. 그는 두 아들에게는 집을 마련해 주었고, 두 딸에게는 결혼자금 일부를 보태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다 해주려 했다. “자식 잘 되는 것만큼 큰 복은 없다”고 말하는 집사님은 지금도 손자, 손녀들에게 용돈을 쥐어주며 그들의 마음을 얻고자 애쓴다. 아이들 또한 그런 사랑을 알고 있는 듯, 집안의 살림과 가전까지 손수 챙겨 드리는 효성스런 자녀들이다. “가정은 갈등 없이, 우애 있게 살아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부모가 떠난 후 다 남남이 돼요”라던 집사님의 말이 오랫동안 귓가에 남는다.


“내 인생의 진짜 감사는 아내입니다”

김광회 집사님은 인터뷰 마지막에 아내에게 영상 편지를 남기며 짧고도 강한 한 마디를 남겼다. “여보, 나한테 와서 고생 많이 했지. 앞으로는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삽시다. 사랑한다.” 고된 농사일, 바쁜 삶 속에서도 부부는 다툼 없이 가정을 이끌어 왔다. 특히 아내는 ‘순대 기술자’로 불리며 주중엔 일을 다니고, 남편은 고추 농사를 혼자 감당했다. 서로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했고, 그 안에서 가정은 지켜졌다. 그의 삶에서 가장 큰 감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아내를 꼽는다. 신앙의 출발도, 가정의 평화도, 교회를 향한 마음도 결국 아내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피어난 것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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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암교회는 내 뿌리 같은 곳”

집사님에게 행암교회는 어떤 존재인지 묻자, 그는 잠시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 “내가 뿌리박고 사는 곳이죠”라고 말했다. 그는 교회의 기초를 다지는 데 가장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교회 건축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으려 했던 때도 있었고, 실제로 목회자를 위해 큰돈을 빌려준 적도 있다. 그 모든 헌신은 교회가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그는 지금도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쌀을 제공하며, 마을 이웃들에게 교회를 권하고 있다. 교회의 외벽이 리모델링될 때도 가장 먼저 동참했고, “교회가 견딜 수 있도록 제가 뒷받침한 거예요”라며 담담히 말한다. 그의 손길은 교회의 외벽에, 교회의 마당에, 그리고 예배당의 공기 속에 남아 있다.


“평생 한 자리를 지킨 자의 기억”

김광회 집사님은 누구보다 이 마을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낙수정 이야기부터 송시열이 과거 길에 들렀다는 전설까지, 그의 머릿속엔 마을의 유산이 그대로 저장되어 있다. 이 마을이 피난처였다는 기억, 상수도도 없던 시절의 물 부족 이야기, 고개를 넘으면 충북이 나오는 지리적 특징까지 그는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 젊은 세대가 몰라서는 안 될 이 마을의 역사를 집사님은 여전히 손에 쥐고 있는 산증인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곧 신앙의 배경이자 교회의 유산으로 남을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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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지만 깊은, 김광회 집사의 신앙”

그의 말은 화려하지 않다. 짧고 담백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누구보다 묵직하다. “내가 잘한 건 없다. 그래도 하나님이 아신다”는 그의 고백은 그의 평생의 신앙을 요약한다. 그는 장례식장에 와줄 사람들에게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할 뿐이다. 담백한 고백, 말 없는 사랑, 그리고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이것이 김광회 집사님의 신앙이다. 그는 자녀들에게도, 손주들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삶 자체가 예배였음을, 누군가는 기억해주길 바라고 있다.


“끝까지, 신실하게”

이제 78세가 된 그는 건강에 대해 걱정이 많다. 몸이 예전 같지 않고, 고추밭도 예전처럼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농사를 짓고, 교회를 섬기고, 가정을 챙기며 살고 있다. 그는 말한다. “나이 먹어도 돈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손자들 용돈도 주고, 자주 오지요.” 자녀들이 먼저 다가오기보다, 자신이 먼저 베풀고 싶은 마음은 아버지로서의 마지막 책임감이다. 그는 삶의 마무리를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준비하고 있다. 죽음을 준비하는 웰다잉 프로그램에도 부부가 함께 참여했고, “이제는 마음이 후련하다”고 말한다. 지금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자녀들이 성실하게, 신앙 안에서 잘 살아주는 것.”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그의 마지막 고백이, 오래도록 여러분의 마음에 남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