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생활, 신앙의 전환점: 진정한 깨달음
정종섭 장로님은 1969년 4월 17일, 스물세살에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논산 훈련소에서 기본교육 6주를 마치고 강원도 화천 7사단으로 배치받았으며, 6주 훈련 후 GOP 부대에서 6개월간 근무했습니다. GOP 근무 기간 동안에는 40명의 소대원 외에는 사람 구경하기 힘들었고, 이 고립된 환경 속에서 장로님은 “다시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겠다. 하나님이 이 기회를 통하여 새롭게 해야 되겠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후 7사단이 운영하는 면회 안내소인 ‘칠성의 집’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칠성의집의 사단마크가 북두칠성 이름하여 칠성부대 2군단 소속된 화천지역 7사단 15사단 27사단 예하부대이며 그 당시 파월장병 훈련장 <오음리> 까지 모든 장병의 가족, 친지, 면회객을 위한 면회 안내소 였다. *휴가 출장 중인 장병들이 칠성의집에 와서 소속부대로 전화만 하면 복귀로 인정하는 곳이 었다* 이는 군대 가기 전부터 행동이 인정받고 신원조회도 통과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임자가 근무 태만으로 해고되었기에, 장로님은 한 눈 팔지 않고 업무에만 충실하여 주변의 시선을 받았습니다. 군종 주특기(780)를 가졌던 그는 사복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약 20개월 이상 평온한 군 생활을 보냈습니다. 또한, 월남전에 갈 기회도 있었으나, 연로한 부모님과 농사를 돕던 동생을 위해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을 모시기로 결단했습니다. 이처럼 군 생활은 장로님의 신앙을 진정으로 깨닫게 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흥구교회와 함께한 유년 및 청년기: 사라져가는 아이들
어린 시절 정종섭 장로님의 기억 속 흥구교회는 1959년 사라호 태풍 때의 모습입니다. 당시 안동의 성서신학원 원장이었던 셀돈 선교사가 흥구 지역의 수해 피해를 듣고 교회를 찾아왔던 것을 보았는데,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장로님은 당시 처음 보는 외국인 선교사에 대해 신기해했다고 회상했습니다. 군대 가기 전까지는 어머니의 강요로 주일에 교회에 나갔고, 차라리 친구들과 고기 잡고 노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 시절 흥구교회는 10여 명의 장년 교인에 비해 50~60명의 주일 학생들이 있었고, 여름성경학교 기간에는 70~80명의 아이들이 모여 15평 남짓한 교회 건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저녁 7시부터 밤 12시까지 진행되던 여름성경학교는 외부 강사(주로 안동 성서신학원 학생들)를 초청하여 진행되었으며, 마치 마을 잔치와도 같아 순수한 봉사 정신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와 80년대 산업화 사회가 도래하면서, 군대 전역 후 많은 청년들이 생계를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가게 되었고, 이로 인해 흥구교회의 청년층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 속 신앙: 순수함의 의미
정종섭 장로님은 젊었을 때 어른들의 신앙과 오늘날 사람들의 신앙 간의 가장 큰 차이를 ‘마음의 순수성’으로 꼽습니다. 장로님은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듯이 믿음의 신앙생활도 그러하다며, 과거에는 사람들이 때 묻지 않고 마음이 순수했다고 설명합니다. 당시에는 라디오가 유일한 매스컴이었고, 텔레비전조차도 잘 사는 사람만 접할 수 있었던 시대였기에, 사람들은 귀로 듣고 마음이 순수했다고 말합니다. 그 시대의 신앙은 “무조건 믿습니다. 아멘 하면 거의 되는” 순수한 믿음이었지만, 정보화 시대인 지금은 휴대폰이나 노트북 등 수많은 정보가 사람들을 유혹하며 과거와 같은 단순한 믿음만으로는 어렵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옛 시대가 사람들이 순수하게 살아갔던 시대였다고 회상하며, 현대의 정보화가 오히려 사람을 더 많이 유혹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가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장로님의 생각입니다.
고향 교회 수호자의 삶: 흥구교회를 지키다
흥구교회가 76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정종섭 장로님은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을 언급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셔야 했기에 객지 생활을 할 수 없었고, 고향을 떠나지 못했으며, 이는 부모님을 위한 ‘희생 아닌 희생’이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교회를 운영해 나갈 사람이 없었다는 점도 교회를 지키게 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장로님 자신에게도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교회를 떠나지 못했고, 지금 돌이켜보면 다시 인생을 산다면 더 멋있게 살아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헌신적으로 흥구교회를 지켜온 장로님은, 20대 때 교회에 다닐 때도 대부분의 교인들은 장로님보다 나이가 많으신 어른들이었다고 회상합니다. 장로님 또래는 많지 않았지만, 청년들이 독서 구락부 활동 등을 하며 교회에 함께 나왔던 기억도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흥구교회의 장점으로 장로님은 ‘인간적인 인간미’와 ‘정’을 꼽으며, 각박한 세상 속에서 서로 친절하게 베풀고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을 강조했습니다.


흥구교회의 현재와 미래 비전: 인구 감소 속 사명
흥구교회는 현재 농어촌 인구 감소라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정종섭 장로님은 비록 슬픈 이야기일 수 있지만, 교회가 이러한 시대 속에서 어떤 사명과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는 최선을 다하고 기도의 목표를 정하여 기도해 왔지만, 상황이 쉽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님은 교회가 존재하는 동안은 마을 사람들 한 명이라도 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남은 자’들을 위해 끝까지 교회를 지켜 나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현재 흥구교회의 가장 큰 기도 제목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새벽기도에 30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가 되는 것, 둘째는 재정적으로 자립하는 교회, 셋째는 당회가 다시 조직되는 것입니다. 장로님 혼자 장로가 되어 총회 총대까지 다녀왔지만, 나이가 70세 이상이 되면서 당회가 해산되었기에, 교회가 다시 조직 교회로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삶의 은혜와 간절한 바람
정종섭 장로님은 평생의 신앙생활에 대해 “감사하다”고 표현하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순간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거나 기적 같은 역사를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가장 최근에 경험한 큰 감사의 사건으로는 20일 이상 비가 오지 않고 폭염이 계속되던 중, 간절히 기도하자 월요일에 비가 충만하게 내린 것을 꼽았습니다. 미천한 자신에게도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하며, 가물었던 땅에 흡족한 단비를 주신 것에 대한 기쁨을 나눴습니다. 이 외에도 가정과 개인,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항상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