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고, 가정을 이루고, 평생을 머물며 하나님을 알아간 사람. 김광회 집사님의 인생은 그렇게 조용하지만 깊은 뿌리로 이어져 있다. 그는 1948년 행암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 마을을 떠난 적이 거의 없다. 농촌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신앙도, 교회도, 가정도 스스로의 손으로 일궈나가야 했던 시간 속에서,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충실히 살아냈다. “고생이라기보다 보람이죠”라며 담담히 말하는 집사님의 고백 속에는 그 어떤 휘황찬란한 간증보다 무게 있는 ‘삶의 신앙’이 배어 있다. ‘인생화원’ 팀은 행암교회 신앙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이 땅의 어른들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이 자리에 섰다. 김광회 집사님은 마을의 역사이자 교회의 역사이며, 이제 그 기억을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는 신앙의 유산으로 남기려 한다.
충남 천안의 시골 마을, 행암교회에서 오랜 세월 권사로 살아온 윤명순 권사님의 삶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줍니다. 화려한 간증도, 특별한 전환점도 없지만 그녀의 하루하루는 오히려 그 담백함 속에서 진짜 신앙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가족을 향한 기도, 예배에 대한 열심, 교회를 위한 헌신은 그녀에게 신앙이 삶이고 삶이 곧 예배임을 증명합니다. 인생화원 팀은 윤 권사님의 신앙 여정을 직접 듣고 기록하며, 오늘날 우리가 잊기 쉬운 순전한 믿음의 모습을 다시 붙들고자 했습니다. 이 기사는 한 권사님의 삶을 통해, 우리가 놓치기 쉬운 소중한 신앙의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게 합니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시골 교회 행암교회의 권사로 살아가는 최승리 권사님은, 이름처럼 ‘승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신앙인입니다. 도시에서의 삶을 내려놓고, 가족과 교회, 지역을 섬기기 위해 다시 시골로 돌아온 그녀의 선택은 단순한 귀촌이 아니라 신앙의 결단이었습니다. 권사님의 삶은 고난으로 단련된 믿음, 가족을 향한 기도, 선교적 비전을 품은 일상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기록은 인생화원 팀이 그녀의 삶을 직접 듣고 정리한 신앙의 여정으로, 단지 한 권사님의 이야기를 넘어서 시골 교회가 품고 있는 신앙의 뿌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잊혀지는 것 같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믿음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고자 합니다.
6.25 전쟁 직후, 삶은 가난했고 마음은 허기졌습니다. 영덕 시골 마을, 일본군 잔재로 남은 가옥에 미국 선교사 부부가 들어왔고, 아이들에게 찬송과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찬양을 듣고 처음 교회에 간 날, 제 마음 한가운데 따뜻한 불이 붙었습니다. 비포장 진흙길을 맨발로 걷고, 성경은 한 권도 없었지만, 말씀은 입으로 전해지고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예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사랑이 어떤 건지 몰랐지만 마음이 울었습니다.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친구들과 함께 예배당에서 울다 웃던 그 날들이, 제 인생의 믿음의 씨앗이 심긴 날들이었습니다.
나는 1936년 낙평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부모는 자식이 많았지요. 나 포함해서 열 명이나 되었는데,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에요. 그땐 약도 없고 병원도 멀어서 아이들이 태어나도 오래 못 사는 경우가 많았어요. 나도 어릴 적에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는데,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니까요. 그 시절은 참 가난했어요. 먹을 것도 부족했고, 입을 옷도 늘 모자랐지요. 흙바닥에서 맨발로 뛰놀았고, 하루 두 끼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때가 많았어요. 그래도 마을 사람들끼리는 서로 도우며 살았고, 그 안에서 웃음도 있었어요. 어려운 가운데서도 부모님은 부지런하고 성실했어요. 덕분에 나도 일찍 철이 들었지요. 나는 어릴 때부터 일하는 걸 배웠어요. 들에 나가 김을 매고, 물 길러 다니고, 겨울엔 장작 패고…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 하는 일을 따라 했어요. 그게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힘들었지만, 그때 배운 성실함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형제들은 다 먼저 떠났지만, 나는 지금도 그 아이들 얼굴이 기억나요. 같이 뛰놀던 동생들, 병석에 누워 있던 누이… 가끔 그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뭉클해요. 살아남았다는 게 감사하면서도, 그만큼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늘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하루하루 성실히 살려고 해요. 살아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니까요.
나는 1937년에 낙평에서 태어났어요. 그때는 다들 가난했지만, 서로 도우며 따뜻하게 살았지요. 아버지는 농사일에 성실하셨고, 어머니는 조용히 집안을 돌보셨어요. 형제들이 많아 밥상에 둘러앉으면 늘 북적였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어요. 나는 어릴 적부터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였어요. 말수는 적었지만, 어른들 말씀은 잘 들었고, 물 긷고 나무하고 동생들 돌보는 일이 익숙했지요. 학교는 3학년까지 다녔지만, 배운 글씨 덕에 지금도 성경 읽을 수 있어 참 감사해요. 그 시절엔 전기도 없고, 비 오면 처마 밑에서 빗소리 들으며 쉬었지요. 명절 때 먹는 찰밥 한 그릇, 새 고무신 한 켤레가 그렇게 기쁘고 귀했어요. 가난했지만 서로 아껴주며 살았고, 그때 배운 성실함과 감사하는 마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