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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화원 PICK







천음전권사님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랑은 인연이 없었어. 학교에 보내줘도 앞문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도망치기 일쑤였지. 아버지는 그런 나를 붙잡아 오느라 진땀을 흘리셨고, 결국엔 "얘는 안 되겠다" 하시고 일찍 시집보내기로 결심하셨지. 학교라고는 도합 30일 다녔을까? 이름 석 자 쓰는 것도 겨우였으니 말 다 했지. 그런 내가 지금 교회 권사로 40년 넘게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놀라. 하지만 난 가끔 생각해. "그때 공부 안 한 게 하나님 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약 공부를 했더라면,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지도 모르거든. 내 삶엔 지식보다 믿음이 먼저 들어왔고, 그 믿음이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왔어. 어릴 땐 울진에서 살다가 부산도 가고, 영양도 거쳐 시집을 왔어. 참 유난한 길을 걸어왔지. 남들처럼 정규 교육을 받은 건 아니지만, 나는 삶으로 배웠고, 고난으로 익혔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으며 지혜를 배웠어. 나처럼 학교 못 다닌 사람도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증명하고 싶었어.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시절 그렇게 공부와 멀어진 것도 감사한 일이야. 하나님이 나를 따로 부르신 거니까. 난 책상 앞에 앉기보단, 예배당 바닥에 무릎 꿇는 법을 먼저 배웠고, 칠판보다 성경 말씀이 더 익숙한 삶을 살아왔지. 그게 내 길이고, 내가 받은 복이었어. 사람들은 배움이 없으면 못 한다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믿음 하나면 충분하다." 내 인생엔 그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줬다네.

김화자권사님

나는 여덟 살 무렵부터 교회를 다녔단다. 경남 함안 읍에 있는 오래된 교회였는데, 벌써 백 년도 훌쩍 넘었을 거야. 당시에는 별명도 없이 조용히 자란 아이였지만, 내 마음은 늘 예배당으로 향했지. 중간에 한동안 쉬기도 했지만,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정식으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어. 그때는 기도도 많이 했고, 하나님 앞에 나를 바치겠다는 마음도 있었단다. ‘나는 평생 주님 일만 하며 살아야겠다’ 생각했었지. 처녀 때는 성교사님들처럼 나도 하나님께 쓰임받고 싶었거든. 그런데 하나님은 또 다른 길로 인도하시더라. 스물다섯이 되던 해, 지금의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고, 결혼하게 되었지. 그 길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이었음을 이제는 알아. 주님의 계획은 참 오묘하고 선하셔.

윤국환장로님

나는 금곡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금곡에서 살고 있어요. 어릴 땐 이 시골이 너무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젊은 날엔 도시로 나갔고, 사업도 하고, 인생의 바다를 참 많이 헤맸지요. 그런데 돌고 돌아 다시 금곡으로 돌아왔을 땐, 이 땅이 얼마나 귀하고 편안한지 새삼 깨달았어요.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지만 정이 있었어요. 친구들과 산에서 뛰놀고, 들에서 일 도우며 컸어요. 어른들 말씀은 무섭기도 했지만 그만큼 삶을 배울 수 있었죠. 그때 배운 순종과 성실이 제 인생의 밑바탕이 되었어요. 도시에서 오래 살다 보니 마음도 거칠어지고, 세상 욕심도 많아졌어요. 사업이 잘될 땐 세상이 내 것 같았지만, 무너질 땐 참 처참했지요. 그렇게 한계에 부딪힌 어느 날,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스쳤어요. "돌아가자. 하나님께로, 고향으로." 그렇게 다시 금곡으로 돌아왔어요. 낡은 집을 고쳐 살고, 밭을 일구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기 시작했죠. 젊을 땐 몰랐던 은혜를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내 삶의 시작과 끝,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요. 고향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불러주신 자리였어요.

이북암장로님

나는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교회라는 곳에 처음 발을 들였다네. 그때가 아마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조용한 초대장이었지. 예배당에 처음 들어선 날, 마음이 참 따뜻했어. 그날 배운 찬송이 아직도 내 가슴에 깊이 남아있네. "고요한 바다로"라는 찬송인데, 그 찬송은 내 삶의 풍랑과 평안을 함께 담고 있었어. 처음엔 가사도 잘 모르고 멜로디만 따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 찬송의 깊은 뜻을 깨달았지. "큰 풍랑 일어나 나 쉴 곳 없어도 주 예수 함께 하시네" 그 가사 한 구절이 지금도 내 귀에 맴돌아. 인생이라는 게 늘 잔잔한 물결만 있는 게 아니잖아. 살다 보면 큰 풍랑도 만나고, 쉴 곳 없이 헤매는 날도 많아.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찬송을 떠올리며 위로를 받았지. 내가 특별히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누가 신앙의 첫 걸음을 어떻게 내디뎠냐고 물으면 꼭 이 찬송부터 이야기하게 된다네. 그 시절 나는 그냥 좋으니까, 예배당 나가고 찬송 부르고 그랬지. 무슨 깊은 신학이나 교리 같은 건 몰랐어. 그저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고, 기도하는 어른들이 있었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가득한 그 공간이 좋았던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은혜였어. 하나님이 내 마음을 조용히 두드리셨고, 나는 순전히 그 마음에 끌려 갔던 거지. 지금도 종종 그때 불렀던 찬송을 혼잣말처럼 흥얼거릴 때가 있어.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특히 그래. 인생을 돌아보면, 참 많은 풍랑이 있었고, 또 그만큼의 고요함도 있었지. 그런데 그 모든 순간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는 걸,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 그렇게 내 신앙의 첫 발걸음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찬송과 함께 시작되었단다.

최옥련권사님

나는 1946년, 영덕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어요. 요즘은 다들 도시로 나가 사는 걸 당연히 여기지만, 나는 그래 본 적이 없어요. 어릴 적 우리 집은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있었지요. 동쪽 문을 열면 바다에서 해가 쭉 올라오는 게 보였고,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어요. 그게 내 인생 첫 기억이자,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풍경이에요. 우리 부모님은 부지런한 분들이셨어요. 밭일도 하고, 장에도 다니고, 집안도 잘 돌보셨지요. 어머니는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분이셨고, 아버지는 늘 묵묵히 일만 하셨던 기억이 나요. 형제자매는 많았고, 나는 그 중에서도 얌전한 아이였어요. 시끄럽게 나서지도 않았고, 말도 많지 않았지요. 그냥 시키는 일 묵묵히 하고, 동네에서 조용히 지내던 아이였어요. 그 시절엔 뭐든 손으로 해야 했지요. 물 긷고, 장작 패고, 논밭일도 도와야 했고. 학교는 초등학교만 다녔고, 더 배우고 싶단 마음도 있었지만 형편이 안 됐어요. 대신 삶을 배웠지요. 어른들 하는 말 귀담아 듣고, 몸으로 도우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사람 사는 법을 익혔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 바닷가 집이 내 인생의 시작이자 믿음의 씨앗이 뿌려진 곳 같아요. 그 시절은 비록 어렵고 가난했지만, 정직하고 순박한 마음으로 살았기에 더 따뜻했지요. 나는 지금도 그 집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바다가 보이던 그 집에서, 내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어요.

임덕조권사님

나는 경상북도 영덕군 매정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어. 그 마을은 말 그대로 ‘믿음의 마을’이었지. 마을 주민들 거의 전부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었고, 주일 아침이면 종소리만 울려도 알아서 예배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어. 아이고, 그때는 예배 빠지는 사람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지. 아버지는 시골 농부였지만, 믿음으로 단단하신 분이었어. 새벽이면 꼭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고, 주일엔 손에 뭐 들고 나가는 일은 절대 없었어. 장을 보러 가는 것도 금기였고, 바느질 하나도 안 했어. 그만큼 주일은 거룩한 날로 여겼지. 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서 그런지, 예배와 기도, 찬송이 자연스러웠고, 교회는 내 숨 쉴 곳 같았어. 지금도 생각나. 우리 어머니가 된장국 하나 끓이는 것도 토요일 밤에 다 해놓고, 주일 아침엔 그저 데우기만 했지. 그게 믿음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예의였어. 아이들 옷도 다려놓고, 새 신발 신기고, 단정하게 머리 빗겨서 교회 보내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해. 그런 집안에서 컸으니, 믿음이라는 게 따로 배운 게 아니라 그냥 몸에 밴 거야. 나는 그 시절이 너무 고맙고, 그 마을이 그리워. 사람들 다 가난했지만, 마음만큼은 넉넉했고, 어려울수록 더 기도하고 서로 도왔어. 믿음이 뿌리처럼 마을에 내려 있었던 거지. 그 믿음의 땅에서 자란 나는 지금도 그 향기를 잊지 못해. 신앙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거라는 걸 나는 매정 마을에서 배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