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로드중입니다.나는 1940년 울진 바닷가에서 태어났어요. 바다가 지척에 보이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지요. 우리는 네 남매였고, 나는 셋째 딸이었어요. 막내는 아니었지만, 언니와 함께 살림을 돕고 동생을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어요. 부모님은 늘 바쁘셨고, 농사일과 집안일이 겹치면 아이들도 일손이 되어야 했지요. 그 시절은 다들 가난했어요. 고무신 한 켤레 아껴 신으려고 장독대 옆에 벗어두고 맨발로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우리에겐 익숙한 삶이었어요. 그렇다고 항상 힘들기만 했던 건 아니에요. 자매들과 강냉이 볶아 먹고, 바닷가에서 조개 줍던 시절은 지금 생각해도 정겹고 따뜻해요. 학교는 오래 다니지 못했어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보니 몇 년만 다니다가 일을 거들어야 했지요. 그래도 그때 배운 글 덕분에 지금도 성경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몸에 밴 성실함과 책임감이 지금까지도 저를 지켜주는 힘이 되었어요. 유년 시절, 고된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로 이어지는 길이 그렇게 천천히 열렸던 것 같아요.
나는 어려서부터 부족함 없이 살았어요. 친정이 꽤 잘살았거든요. 배고픔이 뭔지도 모르고 자랐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시집을 오니, 세상이 달랐어요. 땅을 일구는 개간부터 시작해서, 담배농사며 마늘이며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아침부터 밤까지 손에 흙을 묻히고 살았죠. ‘시집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고됐어요. 특히 담배농사는 고된 일 중의 고된 일이었어요. 담배잎을 심고, 따고, 말리고, 다시 다듬고… 온종일 허리를 굽힌 채 일하느라 허리가 휘었어요. 쉬는 날이란 건 없었어요. 명절에도 시어른들 챙기랴, 일하랴 정신이 없었지요. 친정에서 느꼈던 여유로운 삶과는 너무 달랐어요. 몸도 마음도 지쳐갔지요.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를 지탱해 준 건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었어요. 어린 시절 잘살았다고 해서 세상 물정 모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집살이하며 철이 들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버텼어요.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눈물보다 한숨이 먼저 나와요.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이 지나고 나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게 없다는 걸 깨달아요. 내가 겪은 고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심어줬어요. 그래서 지금은 말할 수 있어요. “그때는 힘들었지만,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업로드중입니다.나는 영덕군 지품면 오천2리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네. 태어난 집도 여기,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여기지. 어릴 적엔 오천1리 쪽에 큰집이 있어서 형제들하고 같이 살다가, 내가 살림을 차리면서 이쪽으로 내려왔지. 그래서 내 삶의 시작도, 끝도 오천이 될 것 같아. 형제는 일곱 남매였는데, 난 그중 셋째였어. 그 시절엔 형제 많은 집이 흔했지. 형님은 참 똑똑했어, 그 시절에 대학교까지 다녔으니까. 근데 나는... 6학년 2학기 때 학업을 멈췄지. 6.25 전쟁이 터지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우리를 이끄셨거든. 학교 대신 똥지게를 지고, 소 오줌이고 사람 똥이고 모아서 보리밭에 뿌리고, 그게 우리 밥줄이었으니. 할아버지는 참 신실한 분이었지. 산에 올라가 밤마다 하나님께 빈다고 기도하시던 분. 시장에 가셔도 꼭 과일 하나 사 오셔서 하나님께 드리고, 그 믿음이 내게도 전해졌어. 우리는 가난했지만, 그 안에 뭔가 든든한 게 있었어. 할아버지 덕에 땅도 조금 사고, 삶의 방향도 조금씩 나아갔지. 나는 학교도 못 마쳤고, 배운 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이 오천 땅에서 내게 맡기신 게 있었다고 생각해. 농사짓고, 교회 섬기고, 자식들 키우고, 그것으로 내 인생을 채웠지. 지금 돌이켜보면, 참 평범하고도 고마운 삶이었다네. 뭘 더 바라겠나, 나고 자란 마을에서, 믿음 지키며 살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나는 1949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났어. 솔직히 말하면, 어린 시절은 참 힘들었어. 6.25 전쟁 직후라 먹을 것도 부족했고, 배고픈 게 일상이었지. 그나마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밀가루 배급이 나오면서 좀 나아졌어.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랑 여동생이랑 셋이 살았지.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20살 때부터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했어. 그때부터 그냥 앞만 보고 살았지.
나는 여수 돌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지. 우리 집은 농사도 짓고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어. 난 어린 시절 별명이 ‘꽁치’였지. 못생겼다고 놀림을 받곤 했어도, 나름대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
가족사진…. 큰아들 벤자민 워싱턴아시아태평양변호사협회 회장 취임식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