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임 권사의 신앙은 어릴 적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권사님은 초등학교 가기 전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밝혔으며, 특히 할머니의 깊은 믿음이 신앙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강조했습니다. 할머니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교회를 다니셨다고 덧붙였습니다. 어릴 적 다니던 서촌교회는 "작은 교회"였고, 현재의 성전은 새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성전을 지을 때 시어머니, 친정어머니와 함께 자신도 동참하며 교회를 세웠다고 말해, 대를 이어 교회를 섬기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의 오랜 신앙생활은 3분기 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서촌리 한복판에서 오순태 장로님은 다섯 대째 그 땅을 지켜오고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 나, 아들, 손주”로 이어지는 삶의 터전은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선 믿음과 공동체의 상징이다. 마을 어른들의 기억 속에서 장로님 가문은 언제나 중심에 있었다. 농사를 주 업으로 살아온 그의 집안은 농경문화의 흐름과 함께 이 지역을 지켜왔다. 예전에는 마을이 훨씬 컸고, 말(馬)을 기르던 지역이었으며, 자연의 위엄이 깃든 삶이 일상이었다. 이제는 한적해졌지만, 그는 여전히 이 땅을 떠날 생각이 없다.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신앙을 지켰고, 후손들 또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장로님에게 서촌은 단순한 주소가 아닌 인생의 뿌리이며, 믿음의 땅이다.
나는 1947년 2월 12일, 포항 기계면 소금실에서 태어났다. 호적에는 2월 11일로 올라가 있지만, 실제 생일은 하루 뒤였다. 그 시절엔 그렇게 되는 일이 많았다. 여섯 남매 중 셋째였고, 집안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그래도 봄이면 송피나무 껍질을 벗겨 죽을 쑤어 먹던 그 기억이, 이상하게도 살가운 유년으로 남아 있다. 배는 곯았지만 마음까지 허기지진 않았다. 1955년,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해 1960년 졸업. 중학교를 마친 건 1963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공부를 꽤 성실히 했다. 우리 부모님은 교육에 있어서는 결단력이 대단했다. 쌀을 팔고, 송아지를 팔고, 논을 조금씩 늘려가며 자식들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요즘 말로 하면 '투자자'였고, 어머니는 행동하는 실천가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버지가 탈곡한 나락을, 어머니가 밤중에 몰래 훔쳐 외가에 팔아 등록금을 마련하신 일이다. 빗자루로 자루를 들어올리며, 남편 모르게 자식들 학비를 챙기던 그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새벽에 나락이 줄어든 걸 본 아버지는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모른 척해준 그 침묵 속에, 두 분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박형기 장로의 신앙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운 날에도 새벽 기도를 다니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고 회고한다. 어머니의 고향인 청송에는 교회가 없었으나, 시집와서 성법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 새벽 기도의 모습은 지금도 장로님의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다. 박 장로는 그 어머니의 기도가 자신의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고 믿으며, 지금도 어머니의 믿음을 따라 힘닿는 데까지 새벽 기도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굳건한 믿음은 어머니가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임을 강조하며, 그 신앙을 지켜나가는 것이 삶의 중요한 부분임을 밝혔다
성법동에서 태어나 100여 년 가까이 이곳에서 살아온 장두이 권사님은 이 동네의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어릴 적부터 성법교회를 다녔던 권사님은 일제강점기의 혹독한 시기를 직접 겪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바람에 삶의 터전을 잃고 포항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잠시 고향을 떠났다가 해방 이후 19살이 되던 해 다시 성법동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어릴 때는 교회를 다녔지만 포항으로 이사 가면서 잠시 멀어졌던 신앙의 끈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이어졌습니다. 옛 교회에서는 남자 성도들과 여자 성도들이 각각 다른 공간에 앉았던 기억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