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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삶과 50년 믿음의 여정: 가구 교회의 산증인

최말림 권사님은 마흔 살 무렵, 남편의 병고를 계기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편은 어린 시절 홍역을 앓은 후유증으로 숨이 차고 피를 토하는 등 오랜 투병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을에 교회가 많았음에도 이전까지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권사님은, 김 권사님과 김태수 장로님의 끈질긴 권유를 받게 됩니다. "예수 믿으면 낫는다, 하나님이 고쳐 주실 것"이라는 그들의 말은 권사님의 마음에 불씨를 지폈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권사님을 부르시어 교회를 찾게 되었다고 회고합니다. 남편은 약 1년간 갈멜산 기도원에서 지내며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고, 그 후 4~5년을 더 살았지만 결국 4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촌에 뿌리내린 믿음

서촌리 한복판에서 오순태 장로님은 다섯 대째 그 땅을 지켜오고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 나, 아들, 손주”로 이어지는 삶의 터전은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선 믿음과 공동체의 상징이다. 마을 어른들의 기억 속에서 장로님 가문은 언제나 중심에 있었다. 농사를 주 업으로 살아온 그의 집안은 농경문화의 흐름과 함께 이 지역을 지켜왔다. 예전에는 마을이 훨씬 컸고, 말(馬)을 기르던 지역이었으며, 자연의 위엄이 깃든 삶이 일상이었다. 이제는 한적해졌지만, 그는 여전히 이 땅을 떠날 생각이 없다.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신앙을 지켰고, 후손들 또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장로님에게 서촌은 단순한 주소가 아닌 인생의 뿌리이며, 믿음의 땅이다.

70년 신앙 여정: 기적과 헌신의 삶

정화석 장로님의 신앙생활은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히 누군가의 전도를 통해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따르고 친구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갔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교회 사택 바로 옆에 있었고,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교회가 위치할 정도로 교회와 밀접한 생활 환경이었습니다. 78세인 현재를 기준으로 볼 때, 약 70년 전부터 교회를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릴 적 교회의 모습에 대한 기억은 매우 선명한데, 처음에는 교회 건물이 일반 가정집처럼 생겼고, 당시 교육관 자리에는 조그마한 교육관이 따로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곳에서 주일학교 예배를 드렸으며, 당시 주일학교 학생 수는 약 4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상희 집사님

박성호집사님

나는 1936년 낙평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부모는 자식이 많았지요. 나 포함해서 열 명이나 되었는데,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에요. 그땐 약도 없고 병원도 멀어서 아이들이 태어나도 오래 못 사는 경우가 많았어요. 나도 어릴 적에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는데,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니까요. 그 시절은 참 가난했어요. 먹을 것도 부족했고, 입을 옷도 늘 모자랐지요. 흙바닥에서 맨발로 뛰놀았고, 하루 두 끼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때가 많았어요. 그래도 마을 사람들끼리는 서로 도우며 살았고, 그 안에서 웃음도 있었어요. 어려운 가운데서도 부모님은 부지런하고 성실했어요. 덕분에 나도 일찍 철이 들었지요. 나는 어릴 때부터 일하는 걸 배웠어요. 들에 나가 김을 매고, 물 길러 다니고, 겨울엔 장작 패고…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 하는 일을 따라 했어요. 그게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힘들었지만, 그때 배운 성실함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형제들은 다 먼저 떠났지만, 나는 지금도 그 아이들 얼굴이 기억나요. 같이 뛰놀던 동생들, 병석에 누워 있던 누이… 가끔 그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뭉클해요. 살아남았다는 게 감사하면서도, 그만큼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늘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하루하루 성실히 살려고 해요. 살아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니까요.

노순자 집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