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수씨 부부는 포항 시내에서 살다가 집을 지어 곡강에 왔다. 자녀는 딸 1명에 아들 1명을 두었다. 딸은 시집갔고 아들은 직장 다닌다. 처음 곡강에 왔을 때는 잠이 안 올 정도로 좋았다고 한다. 이 집이 당시 동네에서 유일한 2층집이었는데 매우 신경써서 지은 집이었고 공장이 하나도 없어서 경치도 좋았다. 그때는 농사도 짓지 않았다. 흥수씨는 원래 현대중공업에서 10년 가까이 엔지니어로 일했는데 IMF가 터지고 회사에서 퇴직하면서 98년도에 버섯농장을 시작 했다. 정애씨는 남편이 버섯을 키우자고 했을 때 대책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같이 시작했다고 한다. 버섯을 기를 때 온도, 습도를 잘 맞춰야 하는데 잘못 해서 버섯이 다 죽기도 했다. 온갖 고생 끝에 방법을 터득해서 지금은 농사 경력이 20년 된다. 환풍기 시설, 공중에서 움직이는 트레일러 등 농장설비를 흥수씨가 손으로 만들었다.
흥수씨 부부는 포항 시내에서 살다가 집을 지어 곡강에 왔다. 자녀는 딸 1명에 아들 1명을 두었다. 딸은 시집갔고 아들은 직장 다닌다. 처음 곡강에 왔을 때는 잠이 안 올 정도로 좋았다고 한다. 이 집이 당시 동네에서 유일한 2층집이었는데 매우 신경써서 지은 집이었고 공장이 하나도 없어서 경치도 좋았다. 그때는 농사도 짓지 않았다. 흥수씨는 원래 현대중공업에서 10년 가까이 엔지니어로 일했는데 IMF가 터지고 회사에서 퇴직하면서 98년도에 버섯농장을 시작 했다. 정애씨는 남편이 버섯을 키우자고 했을 때 대책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같이 시작했다고 한다. 버섯을 기를 때 온도, 습도를 잘 맞춰야 하는데 잘못 해서 버섯이 다 죽기도 했다. 온갖 고생 끝에 방법을 터득해서 지금은 농사 경력이 20년 된다. 환풍기 시설, 공중에서 움직이는 트레일러 등 농장설비를 흥수씨가 손으로 만들었다.
김태자권사는 경산 육동이 고향이다. 고종 형부가 중매를 서서 22살에 곡강으로 시집왔다. 처음에 남편은 포스코에 다니다가 나중에 두호동에서 고기를 잡았다. 두호동에서 3년을 살았는데 술과 담배를 사는데 돈을 다 써서 돈이 없었다. 그래서 직접 땅을 파며 살고 싶어서 곡강에 들어왔다. 힘들게 살았어도 두호동에서 있었던 게 추억이라고 한다. 새댁일 때 바닷가에서 주낙을 정리하는 일을 했는데 그 일이 참 재미있었다. 처음 곡강에 왔을 때는 현재 김성자 권사님이 살고 있는 집에서 살다가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자식은 아들이 2명 있다. 작은 아들이 작년 4월에 결혼했다. 아들 이름이 주은, 주영인데 각각 주의 영광, 주의 은혜라는 뜻이다. 큰 아들은 벌써 자식이 3명이나 있다.
신광면에서 태어나 동해면으로 시집을 가서 살다가 여기로 왔다. 친정이 큰집이라 매일 고기반찬을 하고 손님도 많이 와서 좋았는데 커서 보니 매일 상 차리고 제사지내느라 친구들과 놀 시간도 없어 힘들었다. 물도 멀리서 이어와야 했는데 물 길어 밥하고 설거지하느라 고생했다. 그 때문에 성자씨는 부잣집이나 맏이에게는 절대로 시집을 안 가겠다며 당시에 좋은 사람들 중신 들어온 걸 마다하고 이 집에 시집을 왔다. 처녀때부터 오빠를 따라 교회에 다녔는데 당시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중신을 해주었다. 남편은 9남매 중 둘째였는데 시어머니가 소아마비로 몸 한쪽을 잘 못 쓰는 분이었다. 시어머니가 장가간 큰형님이랑 살겠다고 했는데 큰형님네 부부가 시어머니를 모시지않겠다고 하여 성자씨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시동생과 시누이를 돌보고 학교를 보내고 시집 장가를 다 보냈다.
김장로의 고향은 너구마을이고 천권사의 고향은 대구이다. 1996년 결혼하여 곡강에 정착하였다. 아들 김성운,김성민 형제가 있다.
흥해읍 금장리에 살고 있다. 건강했으나 최근에 시력이 약해져서 시각장애 상태에 있다. 아들 이중혁씨와 함께 사는데, 생활의 편리를 위해 곡강교회에서 집을 새로 짓고 나서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