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락 집사님의 신앙은 1988년, 세탁소 뒤편 개척 교회를 우연히 찾아가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엔 단순히 주일이니까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목사님의 따뜻한 인도 아래 자연스레 교회에 발을 들였고, 이후 10년 가까이 신앙을 떠났던 시간도 있었다.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과 세 자녀를 홀로 키워야 했던 현실 앞에선 믿음을 붙들 여유가 없었다. 다시 교회를 찾은 건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신앙은 회복되었고, 이후 재혼을 통해 믿음의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2024년 1월, 그는 심근경색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갔고, 죽음의 문턱에서 주님을 만나는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된다. “걱정 말아라”는 예수님의 음성과 생사의 경계에서 본 환상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살려주시면 열심히 하겠다”는 병상 위의 약속대로, 지금 그는 교회를 위해 힘을 다한다. “겁나는 게 없어요.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아니까.” 고백 속에 담긴 그의 삶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잔잔한 울림을 전해준다.
믿음도 없던 한 사람이, 교회 문을 열다 송병배 집사님(78세)의 신앙 여정은 평범하지 않다. 기독교 집안도 아니었고, 교회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었다. 그저 몸이 너무 아팠다. 위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고, 협심증과 심근경색, 당뇨까지 겹쳐 숨조차 쉬기 힘든 날들이 이어졌다. 누가 봐도 삶의 끝자락 같던 그때, 그는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그냥… 교회가 궁금했어요.” 어느 날 아침, 이유 없이 교회가 떠올랐고, 아무 준비도 없이 교회로 향했다. 성경책도 없이 낯선 예배당에 앉아 들은 첫 예배는, 이상하게도 마음을 붙잡았다. 익숙하지 않은 찬송가, 설교, 기도. 그 모든 것이 처음이었지만 낯설지 않았다. 그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성경책을 부탁했고, 며칠 뒤 손에 쥔 ‘처음 성경책’을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구멍 뚫린 책, 무지갯빛 빛줄기, 그리고 웅성거리는 허연 사람들. 그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다음 날부터 미친 듯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교회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한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기 시작했다. 질병보다 더 깊었던 영혼의 공허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여덟 살 무렵부터 교회를 다녔단다. 경남 함안 읍에 있는 오래된 교회였는데, 벌써 백 년도 훌쩍 넘었을 거야. 당시에는 별명도 없이 조용히 자란 아이였지만, 내 마음은 늘 예배당으로 향했지. 중간에 한동안 쉬기도 했지만,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정식으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어. 그때는 기도도 많이 했고, 하나님 앞에 나를 바치겠다는 마음도 있었단다. ‘나는 평생 주님 일만 하며 살아야겠다’ 생각했었지. 처녀 때는 성교사님들처럼 나도 하나님께 쓰임받고 싶었거든. 그런데 하나님은 또 다른 길로 인도하시더라. 스물다섯이 되던 해, 지금의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고, 결혼하게 되었지. 그 길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이었음을 이제는 알아. 주님의 계획은 참 오묘하고 선하셔.
나는 금곡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금곡에서 살고 있어요. 어릴 땐 이 시골이 너무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젊은 날엔 도시로 나갔고, 사업도 하고, 인생의 바다를 참 많이 헤맸지요. 그런데 돌고 돌아 다시 금곡으로 돌아왔을 땐, 이 땅이 얼마나 귀하고 편안한지 새삼 깨달았어요.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지만 정이 있었어요. 친구들과 산에서 뛰놀고, 들에서 일 도우며 컸어요. 어른들 말씀은 무섭기도 했지만 그만큼 삶을 배울 수 있었죠. 그때 배운 순종과 성실이 제 인생의 밑바탕이 되었어요. 도시에서 오래 살다 보니 마음도 거칠어지고, 세상 욕심도 많아졌어요. 사업이 잘될 땐 세상이 내 것 같았지만, 무너질 땐 참 처참했지요. 그렇게 한계에 부딪힌 어느 날,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스쳤어요. "돌아가자. 하나님께로, 고향으로." 그렇게 다시 금곡으로 돌아왔어요. 낡은 집을 고쳐 살고, 밭을 일구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기 시작했죠. 젊을 땐 몰랐던 은혜를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내 삶의 시작과 끝,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요. 고향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불러주신 자리였어요.
나는 어릴 적부터 우리 부모님 덕에 신앙을 쭉 지켜왔지. 우리 아버지가 영수였거든. 그때 일제강점기였는데, 주일날 학교에서 나무하러 가라 하니까 아버지가 나무는커녕 절대 가라 하지를 않으시더라고. 그래서 정학도 당하고, 참 어려운 시절이었어. 그래도 신앙이 있으니까 이 모든 걸 견딜 수 있었지. 만주에서도 살았고, 해방 후에 대구로 와서 살면서도 가난했지만, 하나님 믿고 여기까지 온 거야.
권경동씨는 경사경자 동녘동자를 쓴다. 보통 이름에 서울경자를 많이 쓰는데 아버지가 권자도 획이 15획이라 경자가 15획 동자가 15획 해서 합이 45획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실제 나이로는 부인이 연상이지만 주민등록상은 두 분이 동갑이라고 한다. 경동씨가 8살이 되었을 때 이 집으로 이사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자녀는 2남 1녀를 뒀다. 자식들은 다 출가해서 밖에 산다. 맏이는 흥해에, 둘째는 포항 이동에, 셋째는 효자동에 산다. 자녀들이 가까이 살아서 주말에 찾아오곤 한다. 손주는 맏이가 두 명, 둘째가 세 명, 셋째가 두 명을 두었다. 손주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다 귀엽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