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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화원 PICK







믿음으로 이어진 삶

나는 어릴 적부터 우리 부모님 덕에 신앙을 쭉 지켜왔지. 우리 아버지가 영수였거든. 그때 일제강점기였는데, 주일날 학교에서 나무하러 가라 하니까 아버지가 나무는커녕 절대 가라 하지를 않으시더라고. 그래서 정학도 당하고, 참 어려운 시절이었어. 그래도 신앙이 있으니까 이 모든 걸 견딜 수 있었지. 만주에서도 살았고, 해방 후에 대구로 와서 살면서도 가난했지만, 하나님 믿고 여기까지 온 거야.

편차생 할머니

편차생권사님은 신광 만석에서 23살에 정영규씨에게 곡강으로 시집왔다. 아들 2명 딸1명을 낳았다. 큰 아들은 젊을 때 죽었고 둘째 아들이 정승락 집사이다. 둘째 아들은어려서 달리기도 잘 하고 공도 잘 찼다고 한다. 기계과 공대를 가서 기계 고치는 일을잘한다. 남편 정영규 집사님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이장이었는데 새마을 사업을 해서 일을 많이 했다. 길 만들고 창고 짓고 동네경지정리를 하여 마을이 상도 탔다. 그 때는 여자 부인들도 나와서 일을 했고 아카시아나무를 심어 팔아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김연옥 권경동 부부

권경동씨는 경사경자 동녘동자를 쓴다. 보통 이름에 서울경자를 많이 쓰는데 아버지가 권자도 획이 15획이라 경자가 15획 동자가 15획 해서 합이 45획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실제 나이로는 부인이 연상이지만 주민등록상은 두 분이 동갑이라고 한다. 경동씨가 8살이 되었을 때 이 집으로 이사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자녀는 2남 1녀를 뒀다. 자식들은 다 출가해서 밖에 산다. 맏이는 흥해에, 둘째는 포항 이동에, 셋째는 효자동에 산다. 자녀들이 가까이 살아서 주말에 찾아오곤 한다. 손주는 맏이가 두 명, 둘째가 세 명, 셋째가 두 명을 두었다. 손주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다 귀엽다고 한다.

김종하 목사

김목사의 고향은 경상남도 창원이며 사모의 고향은 울산이다. 장신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청하유계교회 담임목사를 거쳐 1998년부터 곡강교회 당회장으로 있다. 1992년에결혼하여 2녀가 있다. 딸 김한슬(24) 대학생이다. 딸 김다슬(22) 대학생이다.

배봉순 할머니

고향은 대신동이고 20살에 곡강으로 한 살 어린 남편에게 시집왔다. 남편은 결혼 당시19살이었다. 자녀는 딸 2명에 아들 3명을 낳았다. 권사님은 자식들이 장성해 어른이되었을 때 가장 기뻤고 자식들이 아팠을 때 가장 힘들었다. 지금은 혼자 집에 살지만 예전에 한동대 학생들이 자취를 했다. 김병관, 이완, 김아람이 살았는데 참 예쁜 아이들이었다. 다공부를 잘하고 착하고 어른 스러웠다. 원래는 절에 다녔는데 그 학생들을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권사님은 심장이 아파 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한동안 거동이 불편했다.

박성호집사님

나는 1936년 낙평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부모는 자식이 많았지요. 나 포함해서 열 명이나 되었는데,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에요. 그땐 약도 없고 병원도 멀어서 아이들이 태어나도 오래 못 사는 경우가 많았어요. 나도 어릴 적에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는데,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니까요. 그 시절은 참 가난했어요. 먹을 것도 부족했고, 입을 옷도 늘 모자랐지요. 흙바닥에서 맨발로 뛰놀았고, 하루 두 끼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때가 많았어요. 그래도 마을 사람들끼리는 서로 도우며 살았고, 그 안에서 웃음도 있었어요. 어려운 가운데서도 부모님은 부지런하고 성실했어요. 덕분에 나도 일찍 철이 들었지요. 나는 어릴 때부터 일하는 걸 배웠어요. 들에 나가 김을 매고, 물 길러 다니고, 겨울엔 장작 패고…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 하는 일을 따라 했어요. 그게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힘들었지만, 그때 배운 성실함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형제들은 다 먼저 떠났지만, 나는 지금도 그 아이들 얼굴이 기억나요. 같이 뛰놀던 동생들, 병석에 누워 있던 누이… 가끔 그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뭉클해요. 살아남았다는 게 감사하면서도, 그만큼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늘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하루하루 성실히 살려고 해요. 살아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