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수 장로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신앙을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며 믿음의 길에 들어섰다. 경북 고령군 덕곡면에서 자란 그는 주일학교 시절부터 예배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장했고, 교회는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가 되었다.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지나며 학업과 사회생활 속에서도 신앙을 이어갔고, 교회 봉사와 성가대 활동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해 왔다. 삶의 여러 시기를 지나며 신앙의 깊이와 모습은 달라졌지만, 예배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는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곡강마을 자체의 역사는 정리된 적이 없다. 그러나 가까운 흥해에 관한 역사적 자료가 많으므로, 그 중에서 곡강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부분을 요약하여 곡강의 역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765년 흥해군 지도이다. 왼쪽에 둥근 성이 흥해읍이며, 두 갈래로 갈라진 강이 곡강이다. 그 아래 만입한 부분에 '봉림호'라고 쓰여 있어서 당시에는 이곳이 호수였음을 보여준다.
1957년부터 마을 위에 천마지를 축조하기 시작해서 몇 년에 걸려서 못을 막았고, 들판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을 정비했다. 이 과정에서 봉림호의 끝 봉림불 앞에 해수갑문을설치하여 역류방지시설을 만들고 간석지 바닥을 준설하여 제방을 만들었고, 천마지가완공되자 저습지의 많은 부분이 농지로 바뀌었다. 이어서 1970년대 중반에는 정영규 동장과원연호 동장 및 이등질 새마을지도자를 중심으로 경지정리 사업이 시행되었다. 확장된농지는 지대가 낮고 물 사정이 좋았기 때문에 주로 벼농사를 지었다. 이로써 저습지 전체가농지로 전환되고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곡강의 미곡생산이 급증하였고 마을의 생활환경이크게 개선되었다. 또한 이 사업은 시행 기간 동안 동민의 취로를 적극 지원하였기 때문에, 농가수입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당시의 취로대장을 참고하면, 대부분의 동민은 이 사업에 노역으로 참여하고 보수를 받았으며 그것이 당시 생활개선의 기초자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나는 금곡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금곡에서 살고 있어요. 어릴 땐 이 시골이 너무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젊은 날엔 도시로 나갔고, 사업도 하고, 인생의 바다를 참 많이 헤맸지요. 그런데 돌고 돌아 다시 금곡으로 돌아왔을 땐, 이 땅이 얼마나 귀하고 편안한지 새삼 깨달았어요.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지만 정이 있었어요. 친구들과 산에서 뛰놀고, 들에서 일 도우며 컸어요. 어른들 말씀은 무섭기도 했지만 그만큼 삶을 배울 수 있었죠. 그때 배운 순종과 성실이 제 인생의 밑바탕이 되었어요. 도시에서 오래 살다 보니 마음도 거칠어지고, 세상 욕심도 많아졌어요. 사업이 잘될 땐 세상이 내 것 같았지만, 무너질 땐 참 처참했지요. 그렇게 한계에 부딪힌 어느 날,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스쳤어요. "돌아가자. 하나님께로, 고향으로." 그렇게 다시 금곡으로 돌아왔어요. 낡은 집을 고쳐 살고, 밭을 일구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기 시작했죠. 젊을 땐 몰랐던 은혜를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내 삶의 시작과 끝,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요. 고향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불러주신 자리였어요.
고향은 대신동이고 20살에 곡강으로 한 살 어린 남편에게 시집왔다. 남편은 결혼 당시19살이었다. 자녀는 딸 2명에 아들 3명을 낳았다. 권사님은 자식들이 장성해 어른이되었을 때 가장 기뻤고 자식들이 아팠을 때 가장 힘들었다. 지금은 혼자 집에 살지만 예전에 한동대 학생들이 자취를 했다. 김병관, 이완, 김아람이 살았는데 참 예쁜 아이들이었다. 다공부를 잘하고 착하고 어른 스러웠다. 원래는 절에 다녔는데 그 학생들을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권사님은 심장이 아파 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한동안 거동이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