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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화원 PICK







방신란 할머니

칠포리에서 자란 18세 처녀로 봉림불 청년에게 시집왔다. 그해에 6.25가 터졌다. 신혼시절을 온통 피난 다니다가 보냈다. 그 뒤 2남2녀를 낳았다. 자녀들은 다 결혼하여 부산과 포항으로 나가 살고 있다. 남편이 79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홀로 마을에 살명서 시금치 농사를 짓고 있다. 시금치를 수확하고 가공하는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손자들 용돈을 주고 싶어서 일을 한다고 한다. 손자녀는 자주 오며 할머니의 건강은 양호하다고 한다. 길가 첫집 남편(63) 부인(59) 부부는 부인에게 병이 발견되어 대구의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갔으므로 면담을 하지 못했다.

이북암장로님

나는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교회라는 곳에 처음 발을 들였다네. 그때가 아마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조용한 초대장이었지. 예배당에 처음 들어선 날, 마음이 참 따뜻했어. 그날 배운 찬송이 아직도 내 가슴에 깊이 남아있네. "고요한 바다로"라는 찬송인데, 그 찬송은 내 삶의 풍랑과 평안을 함께 담고 있었어. 처음엔 가사도 잘 모르고 멜로디만 따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 찬송의 깊은 뜻을 깨달았지. "큰 풍랑 일어나 나 쉴 곳 없어도 주 예수 함께 하시네" 그 가사 한 구절이 지금도 내 귀에 맴돌아. 인생이라는 게 늘 잔잔한 물결만 있는 게 아니잖아. 살다 보면 큰 풍랑도 만나고, 쉴 곳 없이 헤매는 날도 많아.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찬송을 떠올리며 위로를 받았지. 내가 특별히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누가 신앙의 첫 걸음을 어떻게 내디뎠냐고 물으면 꼭 이 찬송부터 이야기하게 된다네. 그 시절 나는 그냥 좋으니까, 예배당 나가고 찬송 부르고 그랬지. 무슨 깊은 신학이나 교리 같은 건 몰랐어. 그저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고, 기도하는 어른들이 있었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가득한 그 공간이 좋았던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은혜였어. 하나님이 내 마음을 조용히 두드리셨고, 나는 순전히 그 마음에 끌려 갔던 거지. 지금도 종종 그때 불렀던 찬송을 혼잣말처럼 흥얼거릴 때가 있어.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특히 그래. 인생을 돌아보면, 참 많은 풍랑이 있었고, 또 그만큼의 고요함도 있었지. 그런데 그 모든 순간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는 걸,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 그렇게 내 신앙의 첫 발걸음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찬송과 함께 시작되었단다.

기도와 헌신의 삶:

어릴 때 여수에서 자랐어요. 우리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정말 신앙심이 깊으셨죠. 어머니는 매일 아침마다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셨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어릴 때부터 신앙 생활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어요. 여수의 바닷가에서 놀면서도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자란 그 시절이 참 그립네요. 바닷가의 풍경과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제 어린 시절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어요. 이때 쌓인 신앙의 기초가 제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최옥련권사님

나는 1946년, 영덕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어요. 요즘은 다들 도시로 나가 사는 걸 당연히 여기지만, 나는 그래 본 적이 없어요. 어릴 적 우리 집은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있었지요. 동쪽 문을 열면 바다에서 해가 쭉 올라오는 게 보였고,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어요. 그게 내 인생 첫 기억이자,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풍경이에요. 우리 부모님은 부지런한 분들이셨어요. 밭일도 하고, 장에도 다니고, 집안도 잘 돌보셨지요. 어머니는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분이셨고, 아버지는 늘 묵묵히 일만 하셨던 기억이 나요. 형제자매는 많았고, 나는 그 중에서도 얌전한 아이였어요. 시끄럽게 나서지도 않았고, 말도 많지 않았지요. 그냥 시키는 일 묵묵히 하고, 동네에서 조용히 지내던 아이였어요. 그 시절엔 뭐든 손으로 해야 했지요. 물 긷고, 장작 패고, 논밭일도 도와야 했고. 학교는 초등학교만 다녔고, 더 배우고 싶단 마음도 있었지만 형편이 안 됐어요. 대신 삶을 배웠지요. 어른들 하는 말 귀담아 듣고, 몸으로 도우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사람 사는 법을 익혔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 바닷가 집이 내 인생의 시작이자 믿음의 씨앗이 뿌려진 곳 같아요. 그 시절은 비록 어렵고 가난했지만, 정직하고 순박한 마음으로 살았기에 더 따뜻했지요. 나는 지금도 그 집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바다가 보이던 그 집에서, 내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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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아니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는 권사님의 첫마디에는 묘한 단단함이 담겨 있었다. 1955년 서울 문래동에서 태어난 그녀의 삶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과 생존의 연속이었다. 어릴 적 계모의 학대로 인해 다리를 다쳤고, 그로 인해 평생을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결국 경찰의 손에 이끌려 부평 성모 고아원에 맡겨지던 날, 그녀는 어린 나이에 부모의 존재를 마음에서 지워야 했다. 그곳에서 수녀님들의 손길 아래 수술을 받고 겨우 걸음을 뗐지만, 몸보다 더 아픈 것은 버려졌다는 기억이었다. “살라니까, 살라고 하시니까, 살아야 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누구도 그녀에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 생명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누군가의 보호 없이 혼자 살아남기 위해, 그저 생존하기 위해 그녀는 무엇이든 해야 했다. 처음으로 삶을 이어가기 위한 선택은 “일”이었다. 몸이 불편한 그녀에게 안정적인 직장은 허락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노점부터 노가다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포장마차도 했고, 나무장사도 했고, 그냥 닥치는 대로 했어요. 애들 굶길 수는 없잖아요.” 그녀는 엄마였기 때문이다. 문순선 권사님의 이야기는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삶은 감히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견고한 믿음의 여정이기도 하다. 신앙은 단 한 번에 시작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천주교 고아원에서 흘러나온 찬송가와 기도 소리, 그리고 수십 년 후 홍성의 어느 전파상 사모님이 건넨 전도의 손길. 그 모든 만남은 권사님의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뿌리를 내렸다. 삶은 무너졌지만, 믿음은 서서히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 문순선 권사님의 이야기는 그 누구의 것보다도 진솔하고, 그래서 더 따뜻하다. 버려졌지만 살아야 했고, 맨몸으로도 기어이 집을 짓고, 다시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그녀의 인생은 ‘은혜’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이제 그 여정을 따라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