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여수에서 자랐어요. 우리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정말 신앙심이 깊으셨죠. 어머니는 매일 아침마다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셨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어릴 때부터 신앙 생활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어요. 여수의 바닷가에서 놀면서도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자란 그 시절이 참 그립네요. 바닷가의 풍경과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제 어린 시절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어요. 이때 쌓인 신앙의 기초가 제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정화석 장로님의 신앙생활은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히 누군가의 전도를 통해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따르고 친구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갔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교회 사택 바로 옆에 있었고,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교회가 위치할 정도로 교회와 밀접한 생활 환경이었습니다. 78세인 현재를 기준으로 볼 때, 약 70년 전부터 교회를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릴 적 교회의 모습에 대한 기억은 매우 선명한데, 처음에는 교회 건물이 일반 가정집처럼 생겼고, 당시 교육관 자리에는 조그마한 교육관이 따로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곳에서 주일학교 예배를 드렸으며, 당시 주일학교 학생 수는 약 4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윤순덕 권사님은 어릴 때부터 청송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출석을 잘하면 도화지나 연필을 상으로 주어 친구들과 함께 교회를 다녔습니다. 철이 들면서 집에서 교회를 못 가게 말리기 시작했지만, '하나님이 항상 너를 본다'는 가르침 때문에 나쁜 짓을 해본 적이 없다고 회고합니다
업로드중입니다.나는 영덕군 지품면 오천2리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네. 태어난 집도 여기,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여기지. 어릴 적엔 오천1리 쪽에 큰집이 있어서 형제들하고 같이 살다가, 내가 살림을 차리면서 이쪽으로 내려왔지. 그래서 내 삶의 시작도, 끝도 오천이 될 것 같아. 형제는 일곱 남매였는데, 난 그중 셋째였어. 그 시절엔 형제 많은 집이 흔했지. 형님은 참 똑똑했어, 그 시절에 대학교까지 다녔으니까. 근데 나는... 6학년 2학기 때 학업을 멈췄지. 6.25 전쟁이 터지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우리를 이끄셨거든. 학교 대신 똥지게를 지고, 소 오줌이고 사람 똥이고 모아서 보리밭에 뿌리고, 그게 우리 밥줄이었으니. 할아버지는 참 신실한 분이었지. 산에 올라가 밤마다 하나님께 빈다고 기도하시던 분. 시장에 가셔도 꼭 과일 하나 사 오셔서 하나님께 드리고, 그 믿음이 내게도 전해졌어. 우리는 가난했지만, 그 안에 뭔가 든든한 게 있었어. 할아버지 덕에 땅도 조금 사고, 삶의 방향도 조금씩 나아갔지. 나는 학교도 못 마쳤고, 배운 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이 오천 땅에서 내게 맡기신 게 있었다고 생각해. 농사짓고, 교회 섬기고, 자식들 키우고, 그것으로 내 인생을 채웠지. 지금 돌이켜보면, 참 평범하고도 고마운 삶이었다네. 뭘 더 바라겠나, 나고 자란 마을에서, 믿음 지키며 살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마을회관 맞은편에 사는 노인회장님 부부이다. 파평윤씨로, 할아버지 때부터 이마을에서 살았다는 윤상수씨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잠깐 나갔던 일을 제외하고는 평생 이 마을에서 살고 있다. 마을 이장을 맡아 일했으며 임기가 끝난 뒤에 다시 이장을 맡아 임기를 두 번 맡았다. 부인 황분선씨는 신광면 기일리에서 시집와서 2남 2녀를 낳고 기르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