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진…. 큰아들 벤자민 워싱턴아시아태평양변호사협회 회장 취임식에서 …
가을을 풍성하게 채우는 국화꽃처럼, 영덕읍교회 김옥금 권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족함 없이 살았어요. 친정이 꽤 잘살았거든요. 배고픔이 뭔지도 모르고 자랐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시집을 오니, 세상이 달랐어요. 땅을 일구는 개간부터 시작해서, 담배농사며 마늘이며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아침부터 밤까지 손에 흙을 묻히고 살았죠. ‘시집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고됐어요. 특히 담배농사는 고된 일 중의 고된 일이었어요. 담배잎을 심고, 따고, 말리고, 다시 다듬고… 온종일 허리를 굽힌 채 일하느라 허리가 휘었어요. 쉬는 날이란 건 없었어요. 명절에도 시어른들 챙기랴, 일하랴 정신이 없었지요. 친정에서 느꼈던 여유로운 삶과는 너무 달랐어요. 몸도 마음도 지쳐갔지요.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를 지탱해 준 건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었어요. 어린 시절 잘살았다고 해서 세상 물정 모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집살이하며 철이 들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버텼어요.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눈물보다 한숨이 먼저 나와요.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이 지나고 나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게 없다는 걸 깨달아요. 내가 겪은 고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심어줬어요. 그래서 지금은 말할 수 있어요. “그때는 힘들었지만,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감꽃 , 홍시처럼 달콤한 영덕읍교회 이수자 집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나는 1937년에 낙평에서 태어났어요. 그때는 다들 가난했지만, 서로 도우며 따뜻하게 살았지요. 아버지는 농사일에 성실하셨고, 어머니는 조용히 집안을 돌보셨어요. 형제들이 많아 밥상에 둘러앉으면 늘 북적였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어요. 나는 어릴 적부터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였어요. 말수는 적었지만, 어른들 말씀은 잘 들었고, 물 긷고 나무하고 동생들 돌보는 일이 익숙했지요. 학교는 3학년까지 다녔지만, 배운 글씨 덕에 지금도 성경 읽을 수 있어 참 감사해요. 그 시절엔 전기도 없고, 비 오면 처마 밑에서 빗소리 들으며 쉬었지요. 명절 때 먹는 찰밥 한 그릇, 새 고무신 한 켤레가 그렇게 기쁘고 귀했어요. 가난했지만 서로 아껴주며 살았고, 그때 배운 성실함과 감사하는 마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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